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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제국이 남긴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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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쥬설팅 2020. 6. 6.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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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양탄자, 하렘, 천일야화 그리고 오늘날 마라톤의 기원이 된 그리스와의 전쟁 등이 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사를 쓴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의 영향 때문인지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 왕은 야만인처럼 그려져  있다.  실상 우리는 그리스나 로마제국이 인류 문명사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열심히 배웠지만, 두 제국보다 앞서 세운 역사상 최초의 거대한 페르시아제국이 인류에 남긴 수많은 유산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아래 사진은 다리우스 1세가 수도로 세운 웅장한 페르세폴리스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불타고 남은  왕궁복합단지  유적지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속국의 사신들을 접견하고 신년하례를 받는 아파타나 궁전을 오르는 계단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사신들이 비단, 향료, 염소 등을 바치는 행렬의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아라비안나이트에서 나오는 '아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알라딘과 요술램프', '신드바드의 모험'을 읽으면서 페르시아가 매우 신비스럽고 매혹적인 환상속의 나라로만 느껴졌다. 그런데 요즘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페르시아를 인문아카데미 강좌 '페르시아 문화유산'을 들으며 재발견하고 있다. 우선 나의 무지를 깨우쳐 준 것은 위대한 고대 문명의 요람인 인류 최초의 광대한 페르시아제국을 계승한 국가가 현재의 이란이고, 히틀러가 독일이 우수혈통의 아리안 족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던 바로 그 아리안 족에 이란인이 속한다는 것이다.

아랍이슬람권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셈족 지역 22개국(사우디아라비아 · 시리아 · 요르단· 레바논 · 이집트 · 튀니지 등)으로 이루어졌고, 페르시아 이슬람권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아리안 족 지역으로 이란과 주로 중앙아시아 지역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등( 나라이름 끝의 -stan은 페르시아어로 land를 뜻한다고 함)을 말한다. 따라서 이란과 이락은 같은 이슬람국가라고 하더라도 인종적 문화적 차이가 있는데다가 종교적 갈등까지 있어 - 이란은 시아파, 이락은 수니파- 아랍이슬람권의 헤게모니를 놓고 1980년부터 8년 동안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기원전 4000년~3000년 무렵, 아리안 족은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살다가 이동하여 일부는 유럽에 들어가 게르만, 슬라브, 라틴의 원조가 되었고 일부는 남쪽의 이란 고원에 정착해 이란인이 되었으며, 더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현재의 인도인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국호가 페르시아에서 1935년 팔레비왕때 아리안이라는 의미인 이란으로 바뀌었다. 이란하면 다 같은 중동의 이슬람국가라고 생각하였는데 중동지역의 이슬람권은 크게 아랍이슬람권과 페르시아 이슬람권으로 나뉜다.

아랍이슬람권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셈족 지역 22개국(사우디아라비아 · 시리아 · 요르단· 레바논 · 이집트 · 튀니지 등)으로 이루어졌고, 페르시아 이슬람권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아리안 족 지역으로 이란과 주로 중앙아시아 지역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등( 나라이름 끝의 -stan은 페르시아어로 land를 뜻한다고 함)을 말한다. 따라서 이란과 이락은 같은 이슬람국가라고 하더라도 인종적 문화적 차이가 있는데다가 종교적 갈등까지 있어 - 이란은 시아파, 이락은 수니파- 아랍이슬람권의 헤게모니를 놓고 1980년부터 8년 동안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여하튼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고대의 페르시아가 인류에게 남긴 많은 유산가운데 특히 과학과 기술을 살펴보기로 하자. 고대 문명의 요람,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 키루스대제가 메디아와 바빌로니아를 정복하여  BC 549년에 페르시아 제국을 세운다. 아케메네스 왕들 중 가장 위대한 왕이라고 불리는 다리우스 1세(Darius The Great)는 제국의 도처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지중해 동쪽 세계를 통일하여 영토를 넓혔다 (~BC 500). 그의 치하에서 페르시아 제국은 서쪽으로는 이집트, 북쪽으로는 터키, 그리고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에서부터 인더스 강까지 이르는 인류역사상 최초의 가장 큰 제국을 이루었다. 제국의 절정기에는 역사상 어떤 제국들보다도  많은 세계 인구의 44%를 지배하였다고 다리우스 대왕(BC 522~486)은 자신의 페르시아 제국 통일에 대한 기록을 오늘날 이란 서부 지역 케르만샤(Kermanshah)의 비소툰(Bisotun)산 암벽위에 세가지 언어 -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아카드어- 로 새겨 놓았다. 이 비문에는 페르시아제국에 속하는 23개 속국의 나라 이름들이 쓰여 있으며  암벽에는 두 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있는 다리우스 대왕과 함께 각국의 제후를 나타내는 9명의 포로들이 압송되는 부조도 함께 새겨져 있다. 이 비소툰 비문(~BC 500)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석비로 로제타 비문(Rosetta Stone: BC 196)과 함께 역사가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대 페르시아 인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민족들의 언어나 풍습들을 그대로 지키게 하는 관용의 정책을 폈다. 그들은 정복한 민족들로 부터 새로운 문화나 아이디어들을 배우고 더욱 발전시키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 고대 과학·기술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아랍의 침략으로  멸망하기전 특히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고대 페르시아 문명의 절정기로 이 기간 동안 로마 문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동서양을 이어주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문화적, 지적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비잔틴 문화와 더불어 문명의 요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페르시아의 멸망(642년)은 이슬람 역사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페르시아 학문의 모든 성과들이 이슬람 문명권으로 넘어가 이슬람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이 문명은 다시 중세 스페인으로 이어져 유럽으로 전파된다. 소위 중세 아랍-이슬람과학의 황금기때 위대한 이슬람 과학자들 중 상당수는 실상 페르시아 과학자들이었으며, 이 시대 때 과학의 중요한 발견들이 아랍어로 쓰여진 것은 당시 아랍어가 국제어로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콰나트는 아케메네스 시대에 전에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지표수 관개가 불가능한 건조 지대에 분포하는 지하 수로식 관개시설로 북아프리카에서 서남아시아를 거쳐 중앙아시아에까지 분포한다. 산지에 내린 풍부한 강수가 지하수로서 산록을 흐를 때, 콰나트는 산록에 수직갱을 파서 원 우물을 끌어낸 다음 수평식 지하 수로를 평지까지 연결하여 필요한 곳에서 지표로 끌어올려 관개 및 생활용수로 사용하였다.


이란에는 대략 50,000개의 콰나트가 있다고 추정되며, 가장 오래되고 긴 콰나트는 이란의 북동쪽 고나바드(Gonabad)시에 있다. 유네스코에 문화재로 등재된 고나바드의 콰나트는 아직도 거의 40,000명에게 농업용수와 식수로 1초당 150 리터의 물을 제공하고 있으며 길이가 45km 이상 된다. 어떤 한 지점에서는 깊이가 350 m 이상 되는 원 우물을 갖고 있으며 아직도 콰나트는 이란의 물의 반을 공급하고 있다.


왕의 도로(The Royal Road: ∼500 BC )

광대한 로마제국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 시절은 페르시아가 세계 문명의 교차로이어서 기원전 약 5세기경 다리우스 1세 때 '왕의 도로(The Royal Road: 맨 위 지도 참조)'가 건설되었다. 왕의 도로는 고대 리디아 왕국의 수도 사르디스(Sardies: 현재 터키의 이즈미르에서 동쪽으로 60마일)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 터키의 중북부를 지나 동쪽으로 구 아시리아(Assyria)의 수도 니네베(Nineveh: 현재 이라크 모술)를 통과한 다음 남쪽으로 바빌론(Babylon: 현재 이락의 바그다드)으로 이어졌다.

바빌론 근처에서 두 길로 갈라져 하나는 북서로 진행한 다음 서쪽으로 엑바타나(Ecbatana)를 통해 실크로드로 이어진다. 다른 하나는 미래 페르시아 수도 수사(Susa: 현재는 이란에 위치)를 통해 남동쪽의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로 이어졌다. 이 “왕의 도로” 는 수사(Susa)에서 사르디스(Sardis)까지 길이 2700 km, 폭이 6.5m에 이르는  고대 고속도로로 다리우스 1세가  자신의 거대한 제국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빨리 전달받기 위해 만들어졌다.

모두 1100개의 역이 있고 역에서 새로운 말을 갈아 탈 수 있어 전령들은 2700 km를 7일간에 주파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마치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포니 익스프레스(Pony Express)를 연상케 한다. 왕의 도로(Royal Road)에 대해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한 은유적 인용구가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좀 더 쉽게 수학을 배우는 길을 유클리드(Euclid) 한테 묻자 “기하학에 왕도란 없습니다 (there is no Royal Road to geometry)" 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바그다드 전지(Baghdad Battery 또는 파르티아(Parthian)전지):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들어진 바그다드 전지 또는 파르티아 전지(그림 참조)라고 불리는 파르티아 시대(BC 247~AD225) 다수의 유물들이 1936년 이락 바그다드 가까이에 있는 Khujut Rabu에서 발견되었다. 이 전지는 높이가 약 14cm, 직경이 가장 큰 곳은 8cm 되는 점토로 된 항아리로 이루어져 있다.

항아리 입구는 지름이 3.3 cm이며, 이 항아리 안에는 높은 순도의 구리 박판으로 만들어진 높이 10cm, 지름이 2.6cm인 원통이 들어 있고, 원통 가운데 높이 7.5 cm, 지름 1cm 되는 철 막대기가 있다. 과학자들은 파르티아 전지와 똑같은 항아리들을 만들어 전해질로서 식초, 레몬주스 또는 포도주등을 사용하여 전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1800년 볼타(Alessandro Volta)가 발명한 전기화학 전지보다 무려 1000년도 더 전에 파르티아인들은 세계에서 최초로 배터리를 만들었으며 확실한 용도는 모르지만  도금을 하는데 사용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페르시아 풍차(Persian Windmill : ~AD 700 )

풍차는 원래 회전축에 달린 날개를 이용해 바람의 에너지를 끌어내는 장치로 역사상 최초의 풍차는 7세기경 페르시아에서 관개(灌漑)용 물을 퍼 올리거나 곡식을 갈기 위하여 만들어진 수직형 회전풍차(페르시아형: 아래 사진 참고)이다. 갈대로 짠 매트나 나무들이 수평으로 나와 있는 지주들에 부착되어  중심의 회전축에 연결되어 있으며 부착된 갈대 매트는 견인력을 야기하여 바람을  따라 돌게 된다. 풍차의 중심 회전축은 점토로 지은 방에 들어 있는 맷돌에 연결되어 있어 마침내 곡식이 분쇄되는 것이다. 풍차는 기원전부터 이미 보급되기 시작했던 수차(물레방아) 와는 달리 아주 늦게 인류 역사에 등장하였다.  

Nashtifan은 이란의 Khvaf 카운티에 위치한 마을로 아프가니스탄 국경으로부터 30km 떨어져 있는데 이 지역의 중요한 특징은 1 년에 120일 가량 불어치는 강풍으로 풍속은 때로는 시간당 120km에 달한다. 따라서 이 지역의 자연적인 요소, 즉 바람을 이용한 풍차가 특별히  Nashtifan에  많이 생겼으며 수세기동안 사용되어 왔다. 역사상 풍차는 페르시아의 풍차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기서 기술을 전수받아 네덜란드를 포함한 다른 나라에서 풍차를 만들게 되었다. Nashtifan의 풍차는 2002년 이란의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야크찰(Yakhchāl: 고대 냉장고 :BC ~400)

고대 페르시아에서는 BC 500년경 식품보관 및 저장을 위하여 야크찰(yakhchal: ice pit: 아래 사진)이라는 얼음저장고를 건축하였다.

야크찰은 모래, 진흙, 계란흰자위, 생석회, 염소털, 재 등을 특정한 비율로 섞어 만든 특수한 모르타르(mortar)를 써서 맨 바닥은 두께가 2m나 되는 두터운 진흙벽돌 벽들로 만들어져 열전달을 차단해 줄 뿐 아니라 완전 방수가 되었다고 한다. 지상은 높이가 18m 되는 큰 진흙 벽돌 돔(dome)구조로 건축되었고, 지하에는 얼음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 5000m³ 나 되었다.

또한 그 지하공간은 일종의 환기시스템인 바드기르(badgir: wind catcher)나 지하수로인 콰나트(qanat)에 연결되어 있어 뜨거운 여름날에도 저장 공간 안의 온도는 용이하게 영하로 내려갈 수 있어 지하공간에 저장된 눈과 얼음으로 장기간 식품보존을  할 수 있다.


크세르크세스 대왕의 부교(浮橋) (King Xerxes' Pontoon Bridge: ~480 BC)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The Great)의 군대가 그리스와의 2차 전쟁때 그리스로 진군하는데 가로놓인 가장 큰 장애물은 유럽과 소아시아를 가르는 좁은 헬레스폰트(Hellespont: 오늘날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길이는 61km 이지만 폭은 1.2~ 6km로, 가장 좁은 곳의 폭은 1.2km정도 되었다. 크세르크세스는 군대를 배로 실어 나르는 대신 길이가 36m 나 되는 배들을 헬레스폰트 연안의 아시아 쪽에 있는 Abysodos에서 유럽쪽의 Sestos까지 수백 척의 배를 이어서 부교 (아래 그림 참고)두 개를 만들기로 한다.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사를 쓴 'The History'에서 부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부교는 만들어졌으나 군대가 도달하기 전 폭풍우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크세르크세스는 매우 격노하여 다리를 만든 책임자를 처형하였다. 병사들이 바다를 향해 고함치는 동안 쇠사슬로 바다를 300번 매질을 하고 뻘겋게 달군 쇠막대기를 바닷물에 담가 바다를 응징하였다. 페르시아 인들은 배를 묶은 후, 헬레스폰트에 부는 강한 바람과 조류에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거대한 말뚝으로 고정시키고 둑에서 맞은편 둑까지 배들을 파피루스나 아마로 엮은 밧줄로 연결한 다음 늘어진 밧줄을 도르래에 걸어 팽팽하게 당겼다.

헬레스폰트의 폭이 1 마일 되는 곳엔 360척의 배, 그리고 좀 더 좁은 곳에는 314척의 배를 써서 두 개의 부교를 만들었다.  부교위에는  나무판자를 쭉 이어 깔고 그 위에  흙을 다져서 기병과 보병이 건너는  도로를 만들었다. 말이나 동물들이 밑의 바다를 보고 극심한 공포에 빠지지 않도록 다리의 양쪽에 스크린을 달았다."


과연이들은 강한 조류와 바람에 맞서 안정되 부교를 만들었는지 

얼마나 피나는 노력과 노동력 그리고 정신력을 바탕으로 힘들게 만든 결과물을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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