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 문명의 달력은 기원전 3114년에 시작한다. 이때가 마야 문명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체로 메소아메리카 문명 최초의 유적은 기원전 1800년경에 건설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기원전 3114년은 마야 문명이 시작되기보다 천 년 이상 전의 일이다.
최근에 기원전 26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었으므로 기원전 3114년에 실제로 마야 문명이 건설되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2013년에는 올멕 문명보다 더 이전의 마야 문명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사진은 삭제됨). 그러나 더 최근의 연구 보고에 따르면 BC2600년경의 유적 연대는 BC1200년으로 재조정되었으며, 마야 토기 역시 BC 1200년에야 등장했을 뿐이다.엘 미라도르(El Mirador)는 BC 600년 건설되어 BC 300~ AD 100년경에 가장 번성하고 AD 300년 이후로 크게 쇠락해 800년경에 완전히 몰락했다. 최대인구는 10만이었다.거대 도시들이 건설된 것은 고전기라고 불리는 서기 250년 ~ 900년경의 시기로, 멕시코 남부와 유카탄반도 남쪽에 걸쳐 유명한 티칼, 팔렌케, 코팔 등의 도시들이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마야 문자가 만들어진 것도 이 시기로 보이며, 주변의 다른 문명들과 광범위한 무역 망을 구축하기도 했다. 얼핏 보면 고대 그리스와도 유사한, 도시 간의 교역을 통한 일종의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그러나 8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서 고전기 마야의 도시들은 연쇄적으로 무너졌는데, 명확한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나 마야 문자의 해독과 유적의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그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우선, 마야의 쇠퇴에는 8세기경부터 나타난 소빙하기가 일차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일부 도시가 쇠퇴 국면에 접어들어 난민이 발생하고, 도시 간의 교역도 축소되었다는 것이다.본격적인 붕괴의 시작은 교역의 중심지였던 칸쿠엔의 유적에서 나타난다. 8세기 중반 칸쿠엔은 주변 국가와 혼인 동맹과 같은 방식으로 우호를 끌어낸 타지 찬 아크(Taj Chan Ahk)의 치세 아래 마야의 중심 권력으로 떠오르는데, 770년경에 지어진 마야 최대의 궁전 유적지(2만 3,000m²의 넓이에 200여 개의 방이 있다고 한다)가 바로 그의 치세에 지어졌다. 그러나 마야는 여전히 연합 국가의 단계였으므로, 타지 찬 아크의 권력은 타 국가들의 합의에 따라 얻은 것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문제는 그의 사후에 발생했다. 그의 후계를 이은 칸 마악스(Kan Maax)는 권력의 중심지가 된 칸쿠엔을 노리는 주변국들의 분란에 휘말려 죽었고, 칸쿠엔은 이후 후계자를 내지 못한 채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교역의 핵이었던 칸쿠엔이 붕괴하고 각국이 서로 전쟁 상태에 돌입하면서 무역 구조가 붕괴하였을 것이다. 이어 연쇄적으로 도시 국가들이 멸망했고 마야는 급속도로 쇠퇴한 듯하다.고전기 마야가 몰락한 이후, 10세기에서 16세기 초까지 유카탄반도 저지대에서 치첸 이트사 등의 몇몇 새로운 도시들이 극소수 나타나 마야 문명을 부흥시켰는데, 이를 후기 마야라고 한다. 그러나 후기 마야의 도시들 역시 스페인인들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에 이미 고전기 마야의 도시들처럼 붕괴해 있었다.그러나 스페인인들이 침략했을 때까지도 마야 문명의 기록은 상당수가 남아있었고 마야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당시의 일부 스페인 학자들은 마야 문자와 그 발음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마야인들은 스페인인들에게 맞서 싸우다가 많은 숫자가 죽었고, 남은 인구의 상당수도 천연두 등의 전염병으로 희생되면서 마야 문자를 읽는 법 등은 완전히 잊히게 되었다. 또한 마야의 기록 대부분도 스페인 선교사들이 불태우고 말아, 지금 남아있는 마야의 책은 4권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 마야어는 고대 마야어와는 달리 로마자를 이용해서 표기한다.마야에서 썼던 문자는 건물과 조각을 비롯하여 곳곳에 남아 있어 해독되고 있다. 문자 자체는 기본적으로 완전히 규명되었지만, 본질적으로 수십 개의 도시 연합에 가까웠던 마야의 특성상 언어 또한 수십 개에 달해 의미를 해독하는 것은 쉬운 과정만은 아니다.수십 개의 도시 연합 중에 통치자의 이름이 남아있는 국가는 코판(Copán), 칼라크물(Calakmul), 믹시코 비에호(Mixco Viejo), 모툴 데 산 호세(Motul de San José), 팔렌케(Palenque), 키리과(Quiriguá), 세이발(Seibal), 티칼(Tikal) 등이다.2018년 2월, 과테말라 정글 속에서 LIDAR 기술을 이용해 6만 개 이상의 건축물이 있는 상주인구 20만 명 규모의 거대 유적 도시가 발견됨에 따라 그동안 학자들이 믿고 있던 마야 문명의 모든 기본적 규모나 역사에 변화를 줄 것으로 예고된다.
문명의 특징
놀랍도록 진보한 역법(曆法), 천문학에 대한 발달한 지식 등으로 보아 사람들에게는 한 개의 문명 대국이 조용하고 평화적이며 철학적으로 발달했던 이미지로 자리잡혀 있지만, 마야 문자가 해독되어 그들이 남긴 기록을 읽을 수 있게 되자 반전이 일어났다.문자가 해독되기 전까지 마야 학자들은 마야 문명이 고도의 철학적, 평화적 문명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특히 마야 연구의 일인자였던 에릭 톰슨의 경우, 평화적인 마야 문명이라는 환상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그가 살아있을 때 이미 진행되고 있던 마야 문자 해독을 통한 실체 접근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의 영향력이 워낙 컸기에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제대로 된 마야 연구가 진행될 수 없었으며 결국 그의 사후에야 소장 학자들이 본격적인 기록해독에 나서서 마야 문명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마야 문명은 인신 공양은 기본에 서로 엎어치고 메치고 마약류의 환각제도 예사로 흡입하던 막장 난세였다. 하지만 이런 난세였기에 눈부신 문명 발전도 가능했다. 기본적으로 그리스 같은 소도시국가의 연맹 형태를 보이고 있었으며 그중 가장 뛰어난 자가 '위대한 왕'이라는 이름으로 실질적 지배를 하는 체제였다. 게다가 한 종족만으로 이루어진 문명도 아니라서, 마야어는 총 33개의 매우 이질적인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가령 마야 문자로 된 비석을 해독할 때에도 그것이 어떤 언어로 쓰였는지부터 알아야 했기 때문에 매우 난해했다고 한다. 라틴 문자와 라틴어를 안다고 해도 그것으로 쓴 한국어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마야 문명의 뿌리는 일찍이 기원전 2000년 이전부터 저지대 메소아메리카에 살던 토착민들에게서 비롯했는데, '마야'라는 이름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실체가 생긴 건 서기 300여 년부터였다. 이때부터 끊임없는 전투와 개발의 역사가 메소아메리카 지대를 지배했다. 이 전모는 20세기 말에 와서야 해독이 된 마야 문자를 통해 알 수 있으며, 마야의 멸망 원인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전처럼 뜬구름 잡듯이 왔다 간 문명이 아닌 그 실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마야문자
마야는 아주 철저한 기록 중심 사회로 한 해의 조세 기록과 호구 조사 등등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으며, 마야 문자는 기본적으로 표음문자이지만 표의문자를 섞어서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알파벳처럼 각각의 발음에 해당하는 문자를 풀어쓰는 것이 아니라 한글에서처럼 발음을 나타내는 여러 개의 기호를 조합하여 사각형의 공간에 맞춰서 표기했다.
마야의 쇠퇴와 멸망
마야의 쇠퇴 원인은 분명하지 않다. 가장 유력한 설명은 과도한 개발로 인한 토양침식, 즉 환경파괴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출토된 동시대 유물에선 치명적인 영양실조의 흔적이 보였고, 주요 생산품인 옥수수가 자랄 수 없을 정도로 토양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주요 생산품인 옥수수 자체가 지력 소모가 심한 작물이었으므로[4]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또한, 마야 문명 후반기에 북부지역이 과도하게 성장하면서 산림을 벌채하고 건축물에 사용할 재료를 구하기 위해 화전을 만든 것이 치명적이었다.게다가 유카탄반도의 생태계는 그만한 인구를 버텨낼 정도로 강인한 생태계가 되질 못 했다. 숲이 벌목과 화전으로 사라지자, 주요 초식 동물들은 순식간에 멸종하여 사냥으로도 지탱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멕시코 쪽의 군사 개입이 마지막 숨통을 끊었으니, 이는 막무가내식 개발의 결과라 볼 수 있다. 이스터섬에서도 유사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그러나 위의 농법에 대한 설명은 유카탄반도 북부의 도시들에는 비교적 잘 들어맞지만, 남쪽의 티칼이나 팔렌케 등의 도시에는 해당하지 않았다. 현재 마야인들의 농법은 화전을 기본으로 하고 북부 해안 가까이 있는 도시들에서는 당시에도 화전을 바탕으로 한 것 같지만, 남쪽의 티칼이나 팔렌케 등에서는 화전 대신 세밀하게 짜인 수로를 이용해서 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수로를 이용해서 물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수로 위에 자라는 수초들을 땅에 뿌려서 비료 겸 뿌리를 보호하는 용도로 사용했으므로 화전 방식보다 훨씬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마야 문명에서는 물이 권력의 상징인데, 수로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것이 국가의 기본적인 역할이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멸망을 부추긴 것으로 간주하는 또 다른 이유는 지배층이 지나치게 전쟁에만 골몰했다는 점이다. 마야의 전쟁은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규모가 커지고 파괴적으로 변해서 여러 번성하던 도시들이 전쟁으로 멸망했다. 말기로 가면 마야 문명의 기록에 다른 도시를 파괴했다는 표현이 종종 등장하며, 실제로 여러 도시의 역사가 끊어졌다. 여기에 과도한 개발 등으로 인한 문제가 계속 심각해지는데도 전쟁과 인신 공양에만 열을 올리는 지배층에 대해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도시를 뒤집어엎었다는 것이다. 농민들의 대규모 반란, 민란에 대한 분명한 근거는 없지만, 도시들이 멸망한 후에도 농민들은 수백 년 이상 도시 주변에서 계속 살았다는 연구 결과가 정황 증거로 제시된다.16세기 스페인인들이 도착했을 때, 아즈텍에 괴멸적인 피해를 준 천연두는 마야에도 마지막 숨통을 틀어막는 수준의 피해를 줬다. 정글 지역에 잔존한 마야의 세력은 계속해서 저항했지만, 스페인군의 진격에 큰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1531년 후기 마야의 중심지였던 치첸 이트사가 함락당했을 때 금방 되찾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스페인의 침략은 이미 막을 수 없었다. 다만 말 그대로 스페인의 주된 침략으로 인해 모두 절멸해버리고 원주민의 혈통이 끊겨버린 멕시코 지역의 원주민들과는 달리, 마야 지역에 해당하는 과테말라의 원주민은 그나마 혈통을 많이 계승한 편이다.여담으로 당시 스페인인들이 더 거대했던 아즈텍 제국이나 잉카를 정복하는 것보다 이 마야를 정벌하는 쪽이 더 오래 걸렸는데,[5] 역설적으로 이는 마야인들의 문명은 이미 붕괴한 상태라 중앙정부가 부재하여 쪼개진 세력을 하나하나 점령해야 했고, 경제 구조 자체가 박살 나서 마야인들은 금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던지라 대체로 콩키스타도르들의 관심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론이 각자 하나씩 있는데 먼저 농경의 경우엔 현대의 화전처럼 대규모 화전으로 생태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면 모를까, 마야 전성기의 인구를 생각하더라도 넓은 정글에 비하면 농경지는 아주 적은 비율이었다. 막무가내식 개발로 자멸할 정도는 아니었던 셈.마야의 인신 공양도 어디까지나 제의의 일부로 소규모로 이루어졌지, 아즈텍만큼 대규모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신 공양도 대부분 사람이 죽지 않았고 지배층이 우선이었다. 왕은 자신의 음경을 뚫어 피를 뽑아 종이에 적셔 태우며 연기를 맡았고, 여왕은 가시가 있는 줄을 혀에 꿰었다. 그 외에 귀 등의 신체 부위를 찔러서 피를 바치거나 했는데, 물론 생명을 희생시키는 의례도 있었지만 주로 물에 던져넣는 방식이었고 연례행사 수준으로 '드문' 일이었다. 공경기에 대해선 말이 많지만, 패배 팀을 전부 죽이는 건 주로 전쟁에서 패배한 적 귀족의 포로들과 형식적으로 하다 죽이는 행위라거나, 승리 팀의 주장을 죽이는 경우는 '신에게 드릴 건데 최고여야지'가 이유였다는 등 지역과 시기별로 차이가 크다. 그러나 이 역시 민중이 질릴 정도로 대규모는 아니었다.전쟁에만 골몰한 지배층에 민중이 등을 돌렸다는 학설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마야에서도 오랫동안 전쟁을 해왔는데, 마야 문명이 무너진 시기에 갑작스럽게 문제가 되었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렵다. 마야 인들도 시나리오에 따라 행동하는 책 속의 등장인물들이 아니라 실제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다른 문명의 사람들보다 특별히 멍청하거나 호전적이어서 자기들이 굶어 죽을 판인데도 전쟁에만 골몰하다 파멸을 면치 못했을까? 그럴 사람들이었다면 애초에 문명을 세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전쟁으로 많은 도시가 멸망했다고 하지만 이는 반대로 문명이 붕괴하는 시점이라서 도시들이 전쟁의 피해에서 회복되지 못했다고 설명할 수 있기에 전쟁이 특별히 더 파괴적이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고, 이 시기에 전쟁이 더 파괴적으로 변할 이유도 설명하기 어렵다. 전쟁의 결과가 파괴적으로 변했다고 해도 이는 붕괴의 원인이라기보다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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