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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스 계곡 문명 그리고 카스트제도 그들의 핵심 유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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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쥬설팅 2020. 6. 5.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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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스 문명(Indus Civilization) 또는 인더스 계곡 문명(Indus Valley Civilization)은 기원전 약 3300-1700년에 있었으며, 기원전 2600-1900년경에 흥했던 문명으로, 인더스 강과 현재 파키스탄과 북서쪽 인도에 걸쳐 있는 가가 하크라 강(Ghaggar-Hakra -)사이에 있었다. 처음 발굴된 유적지가 하라파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부흥했던 시기는 하라파 문명이라고도 부른다. 기원전 1500년경부터 인더스 강의 범람, 삼림 파괴 등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1920년대부터 지금까지 발굴은 계속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활발히 교류해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인장 등 인더스 문명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때로는 인더스 가가 하크라 문명(Indus Ghaggar-Hakra civilization), 인더스 사라스바티 문명(Indus-Sarasvati civilizat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더스 사라스바티 이름은 가가 하크라 강을 리그 베다에 나온 사라바스티 강으로 판정하는 입장에서 부른다. 그러나 언어학적, 지리학적인 관점에서 이 이름이 적당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2.유물

인더스 문명의 도시 유적에서는 많은 테라코타제의 토우, 석회암제의 상(像), 동석제(凍石製)의 호부(護符), 도장 그리고 귀금속으로 치장된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다.

테라코타제의 토우는 신상, 동물, 완구류로 나뉘며, 그 어느 것이나 점토를 손으로 반죽하여 만든 단순, 소박한 조형(造形)이면서도 힘차고 늠름한 미의식을 엿볼 수가 있다. 신상(神像) 토우는 풍요와 다산(多産)의 기원 대상으로서, 유방이나 허리만을 과장한 지모신(地母神)의 부류가 많고, 눈과 코를 극단적으로 생략하며 두발의 상투나 장신구를 되는 대로 만들고 때로는 표정이 파충류와 흡사한 그로테스크한 것도 있다. 동물 토우는 그들이 일상 친근히 여기고 있었던 공작원숭이 또는 거북 같은 것도 조형화(造形化)하였으며 그 조형 감각은 거칠고 소박하지만, 그런 동물들의 특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소박한 솜씨의 테라코타 토우에 비해서, 석회암제나 청동제의 조각상은 제작자와 주문자가 테라코타를 애호한 평민과는 이질적인 사람들로 보이며, 그 조형 감각이나 표현 기법도 놀랄 만큼 뛰어나다. 하라파에서 출토된 석회암제 토르소나 모헨조다로에서 출토된 청동제 무희상(舞姬像) 등을 보면, 양감(量感)의 파악 방식이나 육체의 사실적인 관찰에 의한 모델링의 적확한 표현 등은 현대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

동석제(凍石製)의 호부(부적), 도장류는 거기에 표현된 인더스 문자가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용 목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판면(板面)에 크게 일각수(一角獸), 공작, 무소, 코끼리, 생명의 나무와 같은 주제가 치밀하고 정교하게 인각(印刻)되어 있다. 인더스 문명의 도장은 토테미즘에 의한 부적이라거나 소유권 주장의 도장이라거나 그 밖에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는데, 유품이 서아시아의 엘람 지방이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도 발견되어 그들이 평화로운 무역을 적극적으로 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인도 각지의 사금(砂金), 특히 남인도의 마이소르나 아프가니스탄페르시아 등 각지의 금(金)이 물물교환으로 집적되어 호화로운 금제의 장신구나 은제의 뚜껑이 달린 용기(容器) 등으로 제작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그 밖에 녹로를 사용하여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고 붉은 바탕 표면에 검은 무늬를 그린 뚜껑 달린 항아리 종류가 있는데, 이런 소성 채문 토기(燒成彩紋土器)는 이란의 채문 토기 문화와 유사한 조형, 채화 기법을 보인다.


3.사회

인더스 문명의 도시에는 전문적인 수공업 기술자인 장인들이 살았는데, 이들 가운데 청동제 도구와 무기를 만드는 대장장이, 옷감을 만드는 직조공과 염색공, 토기를 만드는 도공, 장신구를 제작하는 보석공도 존재했다. 물건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장인들도 자연히 늘어갔고 시간이 갈수록 물건들의 질 또한 향상되었다.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외부로의 교역도 활발해졌다. 상인들은 배에 짐을 가득 싣고서 인더스 문명의 다른 도시들은 물론, 멀리 서아시아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역과도 교역했다. 모헨조다로 가까이에는 큰 항구도 있었는데, 과 , 여러 보석으로 만들어진 장신구와 토기, 무명, 양모, 비단 등이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이 활발한 무역을 뒷받침해 주는 또 다른 유물은 인더스 인장이다. 3~4cm 내외의 정사각형 도장으로, 상거래의 과정에서 소유를 확인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발견한 것만으로도 2000여 개가 넘는데, 비슷한 모양의 도장이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발견된다. 이들 인장에는 글자나 기호 외에 여신이나 동물 등의 다양한 모습이 세겨져 있어서 이것이 도장 이외에 부적처럼 사용 되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그림마저도 문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아직 그 내용이 해독되지 않아 정확히 쓰임새를 알 수는 없다.

인더스 문명의 사람들은 땅과 물 등을 섬겼다. 이 시기는 브라만 체계가 확립되기 훨씬 이전이므로 후대 인도처럼 힌두교적 요소는 별로 없었다. 수공업과 상업도 발달했으나, 농업이 가장 중요한 산업 이었기에 농경에 영향을 주는 자연물들을 소중한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특히 땅을 어머니의 모습으로 한 신으로 받들었다. 씨앗을 품었다가 곡식을 내 주는 모습이 마치 어머니가 아기를 배고 낳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은 농사에 꼭 필요했던 동시에 홍수를 일으키는 등 두려운 존재로서 숭배되어졌다. 또한 물에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씻겨주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왔다. 이에 이들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전에 반드시 물로 몸을 씻는 의식을 치렀다. 이러한 물 숭배는 현재까지 이어져 갠지스 강에는 이러한 의식을 치루는 사람들도 인산인해를 이룬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합법적 폭력-공권력이라는것이 외적을 위해서만 필요한것일까? 

사유재산이 발생하고 잉여생산물이 축적되기 시작하면 집단간 전쟁이 증가하기 시작한다는 것이 일종의 인문학적 상식(!)아닌가? 인더스 문명의 거대한 유적으로 볼때 이 사회는 충분한 잉여가 형성되기 시작한 생산력 풍부한 사회였던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그렇다면 내부의 분쟁, 범죄자 집단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서도 공권력과 무장은 필요한것 아니었을까. 대한민국도 초창기에 자신과 대다수의사람들이 살기위해 무기도만들고 방어할수 있는무언가를 만들었듯이 말이다...


4.마지막 인더스인들은 누구일까??

토양을 이용한 농경과 목축을 기반으로 고도의 도시문명이 성립되었다. 도시 중 모헨조다로는 도로와 집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고, 급수/하수, 쓰레기 처리시설까지 갖추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토기와 청동기가 사용된 흔적과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교역한 흔적도 발견된다. 서쪽과의 무역은 이후에도 이어져 유럽인들이 2000년 동안 그놈의 인도 가는 길 찾겠다고 세계를 싸돌아다니는 계기가 되었다. 인장, 도장류의 인더스 문자는 아직까지도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다.

인더스 문명을 영위한 집단이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 현재 어느 인적 집단과 이어지는지 확정짓기는 어렵다. 최근 인더스 문명 시대에 묻힌 고인골 유전체의 분석 결과 이란-북인도에 걸쳐 생활하던 수렵-채집민이 메소포타미아의 농경문화를 받아들여 인더스 문명을 세우는 농경민으로 발전해 나간 것으로 생각된다.(Shinde et al., Cell, 2019) 그 과정에서 인도의 수렵-채집민의 혈통 역시 일부 혼혈이 이루어졌으나 ~13% 정도에 지나지 않아 인도 수렵-채집민의 혈통을 강하게 이은 드라비다인과 혈연적인 연결성은 크지 않다. 다만 인더스 문명 쇠퇴 후 인더스 문명인들이 남하하여 인도 수렵-채집민과 추가로 뒤섞여 고대 남인도인을 형성하는데 인더스 문명이 고대 드라비다어를 사용했다면 이 시기에 남인도에 드라비다어를 전파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드라비다어의 기원은 보통 인도 남부로 생각하는지라 인더스 문명인이 드라비다어 계열의 언어를 사용했을 개연성은 현재로서는 크지 않아 보인다. 한편 남하하지 않은 일련의 인더스 문명인은 북쪽에서 이주한 유목계 인도-아리아어 사용자 집단과 뒤섞여 고대 북인도인을 형성한다. 현재의 인도인은 고대 북인도인과 고대 남인도인이 지역에 따라 제각기 다른 비율로 혼혈이 되는 가운데 오스트로아시아어족 집단이 양념으로 혼혈된 사람들로 분석되고 있다.(Narasimhan et al., 2019, Science)

인더스 문명은 아리아인의 남하 이전 모종의 이유로 쇠퇴하였다. 기후 혹은 인더스 강의 변화가 이유로 지목되고 있지만, 명확한 이유는 아직도 미지의 상태이다.



나의생각은 그러하다 과연 인도 특유의 신분제도인 카스트제도가 탄생하게 됬다. '혈통'이라는 뜻을 가진 이 카스트제도는 아리아인이 원주민을 지배하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하지요. 카스트제도는 신분과 직업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는데요. (우리 삼국시대 신라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와 비슷한 성격이라고 생각되어요. 골품제 역시도 태어날 때 부터 주어진 신분에 따라 관직의 진출범위는 물록이고 집의 규모와 의복등 생활의 전반적인 부분이 규제가 심했었지요
카스트제도는 4개의 신분으로 나누어지는데요. 맨의의 브라만 계급은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베다 경전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인데요. 제사 의식에 조금의 오류가 있거나 부정을 타면 신들에게 크게 진노를 받게 될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면서 그들만의 특권을 유지했다고해요. 그래서 제사의식도 굉장히 복잡하고 절차또한 까다로웠다고 하지요.


두번째 계급인 크샤트리아는 왕족과 무사들이 속하는 신분인데요. 정치와 전투를 담당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세번째 계급은 농업과 상공업에 종사하며 생산을 담당하는 평민 신분인 바이샤들이고요. 네번째는 원주민들로 노예와 같은 수드라계급이 있답니다.  이러한 계급사회는 모든 나라들의 공통점같다 마치 지금은 경찰 FBI CIA등등 정부기관처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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