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과 우리는 언어와 문화, 음식과 생활방식이 전혀 다르다. 중국이 지금 속지주의를 내세워 우리 역사를 날조하며 자기들의 역사라고 함은 실로 언어도단이다. 중국은 자기들의 고대역사가 빈약하자 역사체계를 우리 역사로 대체시키고 있다. 이는 해적행위이다. 상고시대 환국과 배달국, 고조선의 찬란한 역사를 대적할만한 대안이 없는 중국은 우리 역사를 무차별로 칼질을 가하며 역사 도둑질을 대놓고 하고 있다. 그들은 고대 우리와 같은 역사를 논할 바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중원에 먼저 선주(先住)하고 각 민족을 선도(先導)해서 찬란한 문화와 일만 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창조해 낸 주인이다. 그 시대성과 지역성, 그리고 우주자연의 생성원리와 인간과의 조화를 이룬 우리의 선진 한민족(韓民族)의 사상과 철학을 언급할 게재가 못 되는 중국이 우리 민족과 역사를 폄하하며 대중화사상(大中華思想)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류문화의 초석을 놓은 하늘이 택한 천민(天民)=천손(天孫)이다. 우리 선조들은 환국과 배달국은 물론 고조선 이후에도 인류역사의 중심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고대 12부족은 우리와 더불어 서로 화합하고 사이좋게 지냈다. 또 가을추수가 끝나면 부여는 영고(迎鼓), 예(濊)는 매년10월 무천(舞天), 고구려는 동맹(東盟) 등의 제천행사(祭天行事)를 했다. 이는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위지(魏志) 고구려전(高句麗傳)에 나와 있다. 그만큼 여러 부족이 화합하고 평화로운 삶을 구가했다. 이는 우리 한민족이 강력한 국가체제하에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기에 가능했다.
1984년 10월 31일까지 세계사는 인류 문명의 발원이 BC 4000~2500년 동안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에서 태동한 것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BC 4500~3000년 전에 우리 민족은 요하문명을 일궈냈다. 메소포타미아문명보다 1000년이 앞서고 황하문명보다 2000년이 앞선다. 이런 우리 배달민족의 문명인 요하문명(遼河文明)이 세상에 나왔다. 발굴현장에서 5000년 전 여신상도 나왔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에 세계가 놀라고 인류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함을 유수의 학자들은 언급하고 있다.
요하문명은 BC 4500~3000년에 발원해 세계 어느 문명보다 앞서 있다. 또한 우리 선조들이 살았고 문명을 발원시킨 요하에서는 5500년 전 여신묘(女神墓)가 발견되는 등 크고 작은 여신상들이 출토되고 있다. 여기에 사후(死後) 장례에 우리 민족의 무덤인 적석총(赤石塚)이 3단으로 돼 있는데, 이는 중원에는 볼 수 없는 석총(石塚)이다. 석관묘(石棺墓)도 나오는데, 이 묘는 한반도와 시베리아의 그것보다 훨씬 앞선다. 시베리아 보다 2000년 앞선 묘이고, 황하보다 1000년 앞선 묘다. 이에 당황한 중국은 우하량 여신상을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관람하려는 사람들이 가도 방문을 허락지 않는 실정이다. 얼마나 중국의 역사가 없고 부실했으면 여신상을 보려는 사람에게 허락하지 않을까. 오늘은 우리 선조가 일으킨 요하문명과 다른 문명 등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BC 6000년 전, 우리는 중원과 다른 문명이었다
지금까지 세계문명은 BC 3000~201년 사이에 4대문명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BC 6000년 전부터 우리 한민족은 이 4대문명과는 다른 요하(遼河) 문명을 일으켰다. 우리 배달민족의 요하문명인 일명 홍산문명(紅山文明(BC,4500~3000)이 BC 2000년 사해와 소하연 영역까지 미치자 중국은 요하(遼河), 황하(黃河), 장강(長江)문명이라고 이름을 각각 붙였다. 중국은 요하문명(홍산문명)을 중국역사에 끌어들이려고 동북공정을 벌이고 있다. 중국은 장성안의 중국역사라고 하던 것을 우리의 고대역사까지 새로 쓰며 중국문명의 시원(始原)을 우리 요하문명으로 개서(改書)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날조해서 넣으려는 해적행위다.
중국은 BC 3500년경 자신들 선조의 국가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만리장성 북쪽에서 중원보다 더 앞선 문명이 나오자 중국은 다원문명론(多元文明論)을 들고 나오며 이러한 조작 작태를 벌이고 있다. 논리적으로나 문리적(文理的)으로 그리고 이치적으로도 지금까지 그들이 주장하던 역사가 장성(長城) 이북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있겠는가. 만리장성 앞 연산이라는 곳은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다. 요하문명 발상지에서는 거대한 적석총(赤石塚)까지 나오고 있다. 이것은 이집트 피라밋 보다 1000년 앞서 세워진 것으로 장군총과 비슷하고 수천기(數千基)가 분포돼 있다. 적석총은 한반도, 제주도, 일본, 시베리아, 중국 산동반도까지 북방문화계역이다. 우리 민족이 매장된 묘에서 많은 유물들이 나오고 있다. 우하량 적석총에서는 귀한 옥(玉)이 발굴되고 있는데, 한 무덤에서 옥이 20여개도 나왔다. 그 당시 옥 하나를 만들려면 1년 이상 걸리는 시대였다. 이것은 그 시대 강력한 통치자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통치자는 바로 우리 배달국과 고조선의 통치자였다. 요하문명(홍산문명) 유적지발굴로 세계사는 새로 쓰여 지게 됐다.
우리민족은 성(城)을 잘 쌓는 민족으로도 유명한데, BC 2000년경부터 성이 건축되기 시작 했다. 지금 70개 이상 성이 발견되고 있다. 성자산성(城子山城)은 외성과 내성으로 돼 있다. 우리 선조들은 성도 잘 쌓아 국가를 수호하며 고대 인류문명을 일으킨 것이다. 이 문명의 발상지역은 당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췄다. 이 같은 민족은 이 시기 우리 고조선뿐이었다. 고조선은 BC 2333년에 개국했다.
한민족인 홍산인(紅山人)들은 곰에 제사했다고도 했다. 신시의 환웅천황은 보본(報本), 경천(敬天), 숭조(崇祖)하는 수두교(蘇塗敎)를 펴고 법질서를 두루 보호하며 교화하여 살게 했다. 그들이 오랜 신시시대를 지내는 동안에 그 지역의 원주민과 융화, 통혼, 혼합하기도 하고 무력으로 정복, 배제하기도 했다. 곰 상징을 토템으로 하는 종족과는 융화해 통혼하고 범을 상징으로 하는 종족은 배제했다. 이 자손들이 일으킨 요하에서 세계최초의 문명이 나오고 옥이 나왔다. 이 옥은 곰을 형상화 한 웅용(熊龍)이다. 이 웅용(熊龍)은 배달국과 고조선과 관계가 있다. 배달국시대 환웅도 이 곰 족과 혼인해 단군을 낳았다는 역사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풍습이 다르고 신앙하는 신이 다른 중국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데도 중국은 우리 것을 자기들 것이라 우기며 우리 역사를 훔쳐가고 있다.
한민족은 일찍부터 철기문화도 주도했다. 조양(朝陽)에서는 한족과 북방민족의 격전지에서 우리의 비파용 용검(龍劍) 등이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모두 고조선의 검이다. BC 10세기경 고조선 특색의 비파형 동검(銅劍)이 나오는데 이것도 중국은 자기들 것이라 한다. 1963~65년 중국은 발굴조사를 합동으로 해 요서까지 고조선을 인정한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면서 다시 이 모든 것들이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우리의 한민족의 유물을 발굴했을때 자기들것이라고 우길때 합동조사를 통해 더욱더 신뢰 하고 협동해야지 않을까 생각한다
최고(最古) 최초의 문명, 요하문명(遼河文明)
지금까지 세계사는 인류 문명의 발상지가 BC 3000년~2001년 동안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에 의한 문명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요하문명(遼河文明 BC 4500~3000년경)은 다른 문명보다 먼저 일어났다. 요하문명은 우리 한민족에 의한 문명이었다는 것이 세계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지고 있다. 오늘날 세계 고고학자(考古學者)들은 ‘인류문명은 선진문화 민족인 우리 한민족에 의해서 시작됐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요하문명(遼河文明=홍산문명(紅山文明)이 어느 문명보다 먼저이고 가장 빛나는 문명이기 때문이다.
요하문명보다 2000년 뒤늦은 황하문명(黃河文明) 역시 한민족이 중원과 황하강 유역에서 역법(曆法), 천문지리, 의학, 율법, 의식주생활을 고도로 발전시켜 일으킨 것이다. 고대 중국 한족(漢族)이 문명을 일으킨 것은 아무데도 없다. 중국 한족은 그때 이곳에 살고 있지도 않았다. 우리는 지금까지 가장 오래됐다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 4000~3500)보다도 1000년 앞서고 이집트문명(BC 33200~343) 보다도 앞서 인류문명을 발원(發源)한 선진문화민족이다. 바로 요하문명(홍산문명)이라고 하는 문명이 바로 우리 배달한국의 문명인 것이다. 이 문명은 우리 선조들에 의해서 나온 대(大) 문명임을 거듭 강종한다. 여기에 이의(異議)를 달 학자는 없다. 1908년 일본의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는 인류사를 뒤바꾸는 발굴을 했다. 한국 역사를 존중하는 주은래(周恩來) 수상이 발굴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한 것이었다. 지난 1963년, 1979년, 1987년에 요하(遼河)의 적봉산(赤峰山)에서 고고학을 다시 써야하는 충격의 유물들이 나온 것이 그 발굴이다. 이 유물들은 모두 우리들의 유물로 판정됐다.
또한 이곳에서는 우리의 고유의 장례문화인 적석총(赤石塚)과 석관묘(石棺墓), 제단과 정교한 옷 장식, 여신상(女神像) 등 엄청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세계 고고학계가 놀라고 큰 충격을 받았었다. 중국은 이것이 자기 것인 줄 알고 1993년 8월 중국 적봉시(赤峰市)에서 ‘중국북방 고대문화 국제학술 연토회’(硏討會)를 개최했다. 10일간 미국, 영국, 일본, 중국을 포함한 세계 11개국 100여명의 석학들이 이 회의에 대거 참가했다. 여기서 ‘이 문화가 동이족 토착인(土着人=고대 한민족·韓民族)의 문화로서 동방문명의 발상지이며, 세계문명의 창시문화였다’고 전 세계학자들에 의해서 공인됐다. 이제 인류의 문명역사도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문명으로 바꿔 쓰여지게 되는 것이다.
중국의 문자(文字)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낙빈기 학자도 50년간 필생의 대작인 ‘금문신고’에서 ‘동이족이 동양에서 최초로 나라를 세웠음을 발표하고, 중국의 문명 또한 한국의 문명에서 비롯됐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지금도 중국과 일본이 왜곡해 놓은 역사를 그대로 가르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씻을 수 없는 선조에 대한 죄악이며 비극이다. 선조들의 피눈물을 낳게 하고 있다. 이를 방관만 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 현실은 정상이라고 말 할 수 없다. 고구려가 국시(國是)를 다물(多勿)이라 하고 옛 땅을 회복하려는 기상은 어디에 갔는지. 지금 우리는 환국시대(桓國時代), 신시배달국시대(神市倍達國時代), 고조선시대 등 우리 조선(祖先)들이 일궈놓은 아시아 또는 유라시아의 광활한 땅을 다시 찾자는 운동을 하고 그것이 우리 모두의 목표가 돼야 한다. 해방 후 중국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지난 60년대 “요동지방은 원래 조선 땅이었으나 고대왕조가 조선민족을 압록강변까지 내몰았다”고 했다. 하지만 북한지도부는 “현재의 국경선에 만족 한다”는 매국적인 입장을 취해 이들 우리의 땅이 잘못됐으나 통일 후 반드시 찾아야 할 곳이다.
인류문명을 일으킨 선조들의 후손들 각성해야
중국은 1964년 10월 베이징을 찾은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 북한 대표단을 만나 “당신들의 경계는 요하 동쪽(요동)인데 봉건주의가 조선 사람들을 압록강변으로 내몬 것이다. 동북지방 전체를 당신들의 후방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은 요하를 뛰어 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앞서 1963년 6월 조선과학원대표단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중국은 또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너무 좁게 내몰았던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사과해야 한다”고 했는데도 최용건은 “우리는 현재의 국경에 대해 만족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또 동행한 박금철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은 “양국 간 국경은 1962년에 주은래 총리가 아주 분명하게 백두산과 천지문제를 모두 합리적으로 해결했습니다. 현재의 국경선에 만족합니다. 우리는 국경이 요하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매국적인 발언은 요동을 포기한 말이다.
그러나 요동은 우리 땅이다. 중국은 서북공정 후 동북공정으로 우리 역사와 영역(領域)을 도둑질 해 가는데, 우리들의 목표는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 것인지 자성해야 한다. 본래 우주본원(宇宙本源=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환국(환하게 밝은 정치를 하는 나라)에 이어 배달국이 세워졌다. 환웅(환하게 빛나는 정치를 하는 영웅)들은 인류의 여명기(黎明期)를 여는 문명을 창출했다. 그것은 세계고고학자들이 ‘인류의 문명이 요하(遼河)에서 시작하고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음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를 지향해 인류사의 중심에 새롭게 우뚝 서야 한다.
세계는 인류 최초의 요하문명(홍산문명)이 우리 선조에 의해 발원됐음을 확실히 말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들은 곱씹어야 한다. 이 문명은 세계최초의 문명이었지만 단지 그 발견이 늦어져 세계사의 기록되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 이 역사의 주인공인 우리 한민족에게 초점이 모아 지고 있다. 우리도 깨닫지 못한 일이다. 중국이 자랑하는 4700년 전 책이라는 ‘황제내경’ 소문편(素問編)에 ‘동방은 천지가 형성 될 때 처음 생겨난 곳’(東方之域天地所始生也)이라고 하며 우리가 인류 최초의 문화발생지였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최초의 문명이라고 알려진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도 1000년이 앞선 자랑스러운 문명을 가진 배달의 자손임이 밝혀졌다. 당시 메소포타미아는 아시아·아프리카·유럽 각 대륙의 십자로(十字路)에 위치해서 교역로가 예부터 바다와 육지로 통해있지 않았던 시절에 우리 민족이 이동해 일으킨 문명임이 밝혀지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BC,4000~3500)과 이집트문명(BC 33200~343), 인더스문명(BC 2600~1900), 황하문명(BC 2000), 그리스문명(BC 1100~14), 로마문명(BC 27~AD476) 보다 먼저 세계 최고(最古) 최초의 문명을 일으킨 문명국이 바로 우리인 것이다. 또한 이 문명은 다른 고대문명에 직간접적으로 크게 영향을 주었다. 이 같이 자랑스러운 역사가 밝혀지고 있음에도 국내에서는 아직도 중화사상과 식민사관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대중화주의(大中華主義)에 물들고 식민사관에 절여있는 노예근성의 식민사관을 벗어던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나의 생각은 그러하다 세계 고고학계는 우리 한국을 주시하고 있다. 우리 학계가 정신을 차리고 정확한 길로 나아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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