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문명은 이러하다
기원전 4천년 경 나일강가에서 시작된 이집트 문명은 시초부터의 완벽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다. 이집트에서 여러 날들을 보내든, 박물관의 이집트 전시실에서 몇 시간을 보내든 모든 방문자는 이집트 문명의 장엄함과 조화를 이룬 아름다움에 매혹된다. 파라오 시대의 사람들은 현세에서 내세에 이르기까지 접할 수 있는 모든 접근과 구상은 다 해본 듯하다. 이집트 문명이 남긴 유물들은 친근한 느낌과 이국정서가 혼합돼 있어 당혹스러운 느낌을 준다. 즉 고대 이 집트는 가까운 동시에 아득한 영상으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러한 모순이 바로 이집트의 특 성이다.
파라오의 문명은 3천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세기마다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구한 역사 속에서 영원불변의 특성을 지킨 것은 놀라운 일이다. 4세기경 문명이 결정적으로 소멸할 때까지 그 특성을 약화시킨 것은 오직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도래뿐이었다. 고대 세계를 광범위하게 지배했던 것 도 또한 파라오의 문명이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의 정수임을 상기하며 우리가 열중하는 것도 바 로 그런 특성 때문이다. 기원전 3200년 무렵에는 이미 파라오 시대 이집트의 근간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형성되어 있다. 사하 라와 아라비아 고원의 주민들은 사막화된 근거지를 떠나 주기적으로 물이 불어나면 진흙이 넘쳐 관개농업을 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만들어주는 나일강 골짜기를 따라 자리를 잡았다. 이 시기 이집트의 인구는 약 85만명으로 추산된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인구는 끊임없이 증가하여 고왕국 시대에는 160만명에 이르렀 고 기원전 2천년대 중반인 신왕국 시대에는 3백만명에 달했다. 생명의 젖줄인 강은 사람들의 생활에 리듬 을 주었는데, 이 리듬에 따라 1년을 각기 네 달로 이루어진 세 계절로 나누었다. 즉 농사일정에 맞춰 ‘범람 기’ 혹은 수량 증가의 시기(7~10월), ‘출현’ 혹은 경작과 파종의 시기(11~2월), 그리고 ‘건조’ 혹은 수확과 채집의 시기(3~6월)로 구분했다. 나일강과 중앙권력이라는 두 가지 법칙의 아래 살고 있던 농부들은 일찍이 관개농업을 통해 농사를 짓 고 둑과 댐을 견고하게 건설하였다. 그것은 이집트 문명의 초기에 신권을 지닌 군주, 즉 파라오가 상․하 이 집트 전체를 다스리는 강력하게 조직된 정부를 창설했기 때문이다. 행정의 편이와 공공질서를 위해 전 이집트 주민이 공유하는 언어의 기호화는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상형문자가 탄생하는데 이는 많은 부분 이집트 토착동물과 식물계에서 기호를 따온 것이다. 동 시에 고대 동양의 또 다른 위대한 문명인 수메르에서는 설형기호 체계를 만들었다. 정치․경제적인 필요성에 부응해서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이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같은 점이다. 피라미드는 4각형 토대에 측면은 3각형을 이루도록 돌이나 벽돌을 쌓아 올려 한 정점에서 만나도록 축 조한 거대한 구조물이다. 때로는 측면이 사다리꼴을 이루어 꼭대기가 평평한 것도 있다. 피라미드는 일반적 으로 이집트의 것이 유명하다. 그러나 피라미드가 이집트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집트 이외에도 멕시 코, 중남미에 있는 마야, 잉카문명의 유적에도 규모는 작지만 역시 비슷한 피라미드가 존재한다. 그리고 여 러 시대에 걸쳐 피라미드는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서아시아, 그리스, 키프로스, 이탈리아, 인도, 타이, 멕시코, 남아메리카, 그리고 태평양 몇몇 섬에 지어졌다. 또 그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중국과 한국에도 몇 개가 실재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장제용 건축물이었다. 고왕국 창건 때부터 프톨레마이오스시대의 종말에 이르 기까지 2,700년 동안 계속 지어졌다. 그러나 피라미드 건축이 정점에 이른 시기, 즉 피라미드 전성시대는 제 3왕조와 함께 시작되어 제 6왕조와 더불어 종말을 고했다(기원전 2686경 ~ 2345).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는 평균 2.5톤의 돌을 250만개 이상 사용해 만들어 졌다. 게다가 기하학적 모 양인 완전한 정사각뿔로 되어있다. 일반적으로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 왕의 불사(不死)를 상징한다고 알려 져 있다. 다시 말하자면 피라미드는 불사의 희망 아래 건립된 왕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모 양이 피라미드일까? PYRAMID의 PYR은 그리스 어의 PYRO에서 파생된 말로 이 말은 '불(火)' 또는 '열(熱)' 을 의미하는 것이다. AMID라는 말도 그리스 어 MESOS에서 파생된 말로 '존재(存在)', '중심(中心)'과 근사한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피라미드란 말은 '중심에서 타는 불',또는 '타오르는 불의 중심'이라는 뜻이 된다. 피라미드 왕조 기간에 피라미드는 왕묘의 표준적 형태로 지어졌으며 독립구조물이 아니라 건축물 복합 체의 일부였다. 어쨌든 고왕국 시대의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피라미드 자체로서 무덤을 포함 하거 나 무덤 위에 세워지며 사막 높은 곳에 구획된 경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피라미드 옆에는 장제신전이 있 었으며 둑길을 따라 내려가면 흔히 계곡사원이라 불리는 건물이 나오는데 이 건물은 경작지 끝에 지어졌 고 운하를 통해 나일강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에서 약 80기의 왕의 피라미드가 발견 되 었으나 많은 수가 깎여 내려 돌더미로 변했고 보물은 이미 오래 전에 약탈당했다. 이집트의 나일강을 따라 1000 마일에 걸쳐 사람들이 정착되어 있는 삼각주 영역을 통일하는 것이 첫 번 째 파라오 왕조들의 과제였는데, 그들의 무덤은 아비도스(Abydos)와 사카라(Saqqara)에서 발견된 마스타바 들이다
아마도 피라미드의 왕조들의 역사를 알수있있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부분들도 많다
저 시대에 삼각형의 모양과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수 있을까라는....
독립구조와 복합구조를 이해를 해서 만들수있었을까..
마스타바는 피라미드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으며(걸상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라비아어로 이렇게 부른다) 세계 최고(最古)의 석조 분묘이다. 마스 타바는 진흙벽돌이나 돌로 만든, 꼭대기가 평평한 4각형 구조물로 지하실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제3왕조(기원전 2800년)의 조제르왕은 임호텝을 건축가로 기용해 거대한 마 스터바를 겹쳐 쌓아 이른바 계단식 피라밋을 만들었다. 피라미드가 발생된 초 기의 단위를 경제적이며 정치적인 체제(order)로 변화시켜서 기원전 300년 경에 이르기까지 오직 두 번만 중단되고 지속될 수 있게 만든 것은 참으로 제3왕조의 조세르 파라오와 그의 고관이며 건축가였던 임호텝의 업적이었 다. 임호텝은 석재로 커다란 복합건물군올 지은 역사상 첫 번째 건축가이었 다. 또한 그는 천문학자, 마술사, 그리고 의사였고, 후에 가서는 반신반인(半 神半神)으로 숭배되었다. 조세르의 피라미드는 높이가 8m였고 각 변의 길이 가 63m인 정4각형평면의 구조물이었다. 일단 완성된 마스타바 위에 4면 바닥 에서부터 증축되어 꼭대기로 갈수록 좁아지는 4각형의 구조물을 덧붙임으로서 조세르가 지은 애초의 마스타바 는 서로 다른 6개의 층을 갖는 높이 60m, 밑변이 가로 120m, 세로 108m에 이르는 계단형 구조물이 되었다. 사카라에 있는 이 구조물은 이집트에 세워진 중요한 석조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하부는 지 하복도와 방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며 가장 중요한 부분은 깊이 25m,너비 8m의 중앙통로인데, 그 아 래에 아스완산 화강암으로 만든 지하 매장소가 있다. 이 계단식 피라미드는 길이 544m,너비 277m의 거대 한 벽으로 둘러친 경내에 있으며 왕이 사후세계에서 쓸 물품을 놓아두던 다른 석조구조물의 잔해가 남아있 다. 사카라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다슈르에 있는 '뭉툭한', '잘못된', '굴절', '장사방형' 피라미드로 불리는 특이한 모양의 구조물은 엄격한 4각 뿔 무덤으로 발전하는 단계를 나타낸다. 제4왕조의 스네프루가 세운 이 피라미드는 각 변의 길이가 188m, 높이 약 98m이다. 특이하게도 이중경사가 있어서 중간 위로는 기울 기가 달라지는데 아래쪽이 위쪽보다 더 가파르다. 이것은 조세르의 계단식 무덤 보다 순수한 4각뿔에 더 가까운 모양이다. 역시 스네프루 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 마이둠의 기념비적 구조물은 당초 설계와는 다른 모양이지만 순수한 4각뿔의 형태이다. 초기의 구조체가 점점 확장 되어 거대한 8단의 석조물 더미가 되었고, 이후 테라스를 돌로 메워 연속된 경사면을 만 들었다. 마지막으로 구조물 전체를 평탄한 석회암 층으로 뒤덮어 기하학적으로 순수한 4각뿔을 만들어 냈 다. 그러나 많이 파괴된 결과, 지금은 70m 높이의 3단 피라미드 모습이다. 처음부터 4각뿔로 설계, 시공 된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묘는 다슈르에 있는 ‘북피라미드’로, 일설에 의하면 스네프루가 세운 것이라 한다. 밑 변의 길이는 약 220m, 높이는 104m이다
이집트 피라미드 중 가장 큰 것은 기자에 있는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의 피라미드이다. 이곳에 있는 피 라미드는 모두 제4왕조(기원전 2600~기원전 2480)에 만들어진 것이다. 가장 큰 것은 쿠푸왕이 카이로 남서쪽 15 km에 위치한 기자에 건축한 피라미드이며, 다음으로는 카프레 왕의 것으로 136미터, 세번째가 멘카우레 왕의 것으로 62미터에 달한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밑변의 길이가 233미터로 대피라미드 또는 제1피라미드라 일컬어지며, 높이 146.5 m(현재 137m), 저변 230m, 사면각도는 51 °52 '이다. 각 모서리는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오차는 최대의 것이라도 5° 30'에 지나지 않은 만큼 극히 정교하다.
노예문화
이집트의 노예제도에 관한 우리들의 개념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곳에서 경험했던 것에 관한 구약 성 서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성서의 이야기로부터 피라미드 시대로 소급하여 외삽법(外揮法)으로 추정하는 것 에 대해 조심을 하여야 한다. 유대인들은 외국 종족이었고 이집트 노동자들과는 다르게 취급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집트가 동에서 온 침입자인 힉소스Hyksos에 의해 지배되던 제 2중간기(기원전 1680년부터 1580 년까지)동안에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살았었다. 이런 외국인 정복자들은 노예 집단에 관한 생소한 아이디 어를 가져왔는지도 모르고 정복자로서 주민의 어떤 집단을 노예로 만들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느꼈을지 도 모른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경험은 이집트에서 전형적인 것이 아니다.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가 기자(Giza)를 방문해서 파수병인 스핑크스에다 그의 이름의 머리글자를 새겼 을 때 그곳에 있든 피라미드들은 이미 매우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시저로부터 현재 우리 시대까지의 연대 경과보다도 쿠푸왕으로부터 시저까지의 연대가 더 많이 경과되었다. 피라미드의 표면 피복석재가 아직 완전했을 때 피라미드는 더욱 아름다웠을 것이지만 오히려 시간과 기후와 인간에 의해 파괴된 후에도 이 것들 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경이로운 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피라미드 시대에 창안된 또 하나의 것인 중앙집권적 국가 제도 역시 여전히 현재 우리에게 남아 있다. 중앙집권제도에 우리는 너무 익숙해서 역사상 특별한 시점 에서 중앙집권제도가 창안되어졌고 발달되어야만 했었다는 사실을 차분히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다. 쿠푸왕의 거대한 피라미드는 그 단순성에서 건축의 최 초기 상태를 말해주고 그 규모에 있어서는 그 부와 능력 을 의식하게 하는 경제성에 대해 설명해 준다. 이집트 시 대에서나 중세의 프랑스 또는 현대에 있어서나 건축이 어떻게 보상되는가는 변함없이 매력적인 질문이다. 분묘 를 건설하겠다는 그 결정이 경제체계와 정부를 발생시켰 다는 것은 예기치 않았으며 그만큼 매혹적이다. 계단형 피라미드는 왕의 분묘의 형태를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이집트 사회에서 경제적, 정치적 체계를 변화시켰다. 절벽의 분묘, 피라미드 또는 사원 등의 고대 이집트 건 축물들은 심미적인 고려뿐만 아니라 천문학적인 구성까 지도 함께 고려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끝으로 이러한 어 마어마한 유적들을 건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또 다른 요소의 하나는 자신들의 막강한 권력을 표현하고 싶어 했던 왕들의 강력한 욕구였다. 거대한 수평현관이 기둥의 숲으로 채워진 불가사의한 홀 앞에 보초처럼 서 있다. 오직 선택된 사람들만이 이 홀안에 들어갈 수 있었고 이들 홀의 벽은 극히 소수만이 완전히 해독할 수 있는 삽화가 든 비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파라오의 권력이 지닌 그 총체적인 범위를 이해해 보려고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이집트의 노예계층에서 볼수있었던건 지금 우리와 같다는점?
말귀만 틀릴뿐이지 계급층은 여전히 아니 더 심해졌을수도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더... 많은걸 느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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